나이 들어감은 기시감이 활성화되고 감수성은 지워져 간다. 예전에 나이 드신 할머니들의 옹고집스러운 (주변 상황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일관된 무표정의 모습을 스스로 발견한다. 산들거리는 봄바람조차도 그리 달콤한 것이 아니라는 때로는 바람의 내음까지도 맞지 못하는 지경의 문턱을 넘나들고 있다고나 할까?
반면에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은 활성화가 된다. 대 부분의 상황이 기시화 된다. 이미 초입 부분에 혼자서 저 멀리 뒤로 달려간다. 이미 어디서 치른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친숙한 분위기가 아닌 경우는 그래도 약간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음을 알고 있다.
노화의 전형적인 한 단면이라 전혀 놀랄 부분은 없지만 아주 가끔 자신에게 섭섭한 기분이 오르는 것조차 막을 수는 없다. 다만 구획 정리가 큰 동요 없이 발생하기 때문에 빛과 그림자의 운명을 빌려서 서로 상쇄를 시킨다. 그나마 이 정도는 미래의 발생 가능한 현실은 따로 떼어 놓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단면적인 경험으로 점쟁이가 되기 시작하면 주변이 거덜이 나기 전까지 멈출 수가 없다.
젊음은 기시감 대신에 왕성한 감수성으로 활동적일 수밖에 없다. 구경거리도 먹을거리도 차고 넘친다. 스스로도 내재적으로 욕구와 욕망의 동력을 주체하기가 힘들다. 어서 차고 나가야 하는 급한 마음에 머물러서 돌아 보기가 여의치 않다.
희한한 것은 전혀 그것이 부럽지 않다는 점이다. 아마도 개인적으로 충만한 젊음의 기운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요사이 전혀 감동스러운 느낌이 없어서 이것이 무엇이지 궁금했는데, 결국 답을 찾아냈다. 감수성이 완전 메마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