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시제에서 미래였던 것이 이제는 대부분(?) 과거로 넘어가니 문득 미래에 대한 궁금증이 한참 융성했던 과거의 장면이 몇 차례 등장하여 쓰윽 실소를 지었다. 그리고 확실한 것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 같은 것에 대한 그 시점의 갈망이 나타났다. 좀 더 포커스를 집중하다 보니 어쩌면 그 시점에서 아예 불확실이라는 것을 고려하지 않은 거야?라는 의구심까지 떠올랐다.
그 무엇이 되었든, 주관적인 자아의 반경 아래 수동적으로 딸려 다니던 강렬했던 주체성이 (표현만 멋지군) 과거사 청산이라는 이름으로 무대에 재 등장하게 되었다.
의욕의 에너지가 충만한 시절에는 불확실이라는 가능성을 집어넣을 여지가 없다. 자체적인 힘이 충만한데 그 서슬 퍼런 기운을 제어한다는 발상이 떠오르는 것은 자체적인 모순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나고 나면 깨지는 필패의 구도 아래에서도 (자체적인 해석으로는 행운, 타자의 입장은 요행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길을 만든다는 착각으로 객기를 부리게 된다.
아니면 주어진 환경과 사회적인 구도의 견제로 결국 그 뜻을 포기하거나 애써 수정하여 모난 돌이 둥글게 바뀔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닌다. 이러한 모양새는, 흔한 표현으로 현실과 이상의 괴리라는 단어에 함축적으로 녹아 들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늘그막에 자아 찾기니 버킷 리스트니 부축이는 상술과 연계된 사탕발림에 넘어갈 위험이 높아지기 쉽다. 거의 최후의 향연이라고 칭하면 너무 칙칙한 기분이 들어서 피하게 되지만 일정 부분 역할은 인정해야 한다.
실성하지 않고는, 자신의 의식의 정체성과 통합성을 죽는 그날까지 유지하게 되어 있기에, 어지간해서는 불확실성을 내면적으로 체득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 결과 이런 영역은 퇴화되거나 흔적으로 축소되어 기억 속의 다양한 단어의 하나로 밖에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러니 확실하지 못하다는 뉘앙스만 풍겨도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직관적인 판단으로 불안과 회의가 나타나게 된다.
물론 중간에 러시안 룰렛에서 생존한 최후의 1인의 존재 가능성은 있다. 그렇다고 스스로가 모든 총알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착각이다. 그런 것은 결과적으로 발생한 현상이지 과정에서 답습을 하기에는 너무 무리수가 따른다.
본능적으로는 불확실성을 회피하게 배선되었지만 그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성장 일지도 모른다.
'MisC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다, 마지막 장애물 (0) | 2022.12.15 |
---|---|
소진된 여분의 카드 (0) | 2022.12.14 |
자체 모순 (0) | 2022.12.11 |
이문열 작가 탐구 (0) | 2022.12.10 |
새 술은 새 부대에 (0) | 2022.12.09 |